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배경 == 원래 [[맨해튼 계획]]은 [[우란프로옉트|나치 독일의 핵개발]]을 우려하여 이를 선점하고자 [[미국]], [[영국]] 공동계획하에 추진된 것이지 실제로 핵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대의 핵무기는 아직 시험조차 되지 않은 신병기였으므로 잘못 투하하였다가 불발이라도 나면 오히려 [[추축국]]에게 기술만 고스란히 넘겨주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기껏해야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트럭(Truk. 현재의 [[미크로네시아 연방]] 추크 주) 제도에 투하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을 뿐이었는데 이것도 해상에 투하해야 핵기술 회수와 습득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 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다. 특히 식민지로 삼고 있던 [[한반도]],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 등을 깔끔히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같은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까지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 가지고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아울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 또한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여 국체 보존과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일방적으로 해 버렸는데 이렇게 되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은 전쟁 지속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마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제국은 [[결호작전|1억 총옥쇄]]를 외치며 끈질길 정도로 저항하였고, 이 저항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났다. 이 두 전투에서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곧 있을 [[몰락 작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써 핵무기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 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그 20억 달러를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다.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로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선거는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앞선 상륙 작전에서 유권자들의 아들들은 죽어나갔고 그 와중에 전쟁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20억 달러나 들여서 완성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쓰지 않았다는 건 당시 유권자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이러한 당시 미국 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 [[존 키건]]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